시편23편 설교, 2절 푸른 초장에 눕게 하시니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 하나님의 숨결 아래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단지 높은 보좌 위에 앉아 계신 전능자만이 아니라, 들판의 먼지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은 시편 23편 2절입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2). 말씀 자체가 하나의 풍경입니다. 들판이 있고, 바람이 있고, 물가가 있고, 그 가운데 누워 있는 양 한 마리. 그런데 그 장면의 중심에는 보이지 않는 존재가 있습니다. 목자이신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이 이 절을 노래할 때 사용한 히브리 시의 언어는 단지 설명을 위한 문장이 아니라, 감각을 일깨우는 소리였습니다. 히브리 시는 반복과 평행구조, 이미지 중심의 시어들을 통해 독자의 심장을 건드립니다. 이 2절은 구조상으로는 병렬시이며, 내용상으로는 점진적 고조를 보여주는 시입니다.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 이 두 이미지는 단순한 자연 묘사가 아니라, 인생의 안식에 대한 복음적 은유이며, 영혼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호흡입니다.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우리가 함께 숨 쉬듯, 쉼을 회복하길 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눕게 하시는 분입니다 (시 23:2)
성도 여러분,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라는 말씀에서 가장 인상적인 동사는 ‘누이신다’입니다. 여러분, 양은 쉽게 눕지 않습니다. 두려움이 있거나, 불안하거나, 배가 고프거나, 무리가 시끄러우면 절대 눕지 않습니다. 양이 눕는다는 건, 그 환경이 전적으로 안전하다는 신호입니다. 다윗은 지금 단지 풀밭에 있다는 사실보다, 자신이 ‘눕는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는 분이시지만, 때로는 먼저 눕게 하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강요가 아닙니다. 억지가 아니라, 신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눕게 하신다는 건, 우리가 그분 안에서 긴장을 내려놓아도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엎드려도, 세상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선언입니다.
‘푸른 풀밭’은 유목문화에서 생명의 상징입니다. 광야 한복판에서 푸른 풀을 본다는 건 기적과도 같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광야 같은 인생길에 하나님께서 기적처럼 마련하신 생명의 오아시스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먹이시는 분이시고, 우리를 안식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누이심'은 단지 육체의 휴식이 아니라, 존재 전체를 감싸는 치유의 은총입니다.
하나님의 쉼은 생명에서 시작됩니다 (시 23:2)
‘쉴만한 물가’라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메이 메뉴콧’이라 하는데, 이 말은 단순한 호숫가나 강변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정적인 물의 자리’, 곧 흐르지 않는 고요한 샘을 뜻합니다. 광야에서 물은 생명 자체입니다. 그러나 이 물은 단지 목마름을 해갈하는 수단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물은 ‘쉴만한’ 물입니다. 즉, 단순한 기능이 아니라 존재 전체를 위한 위안입니다.
다윗은 지금 물을 마시는 장면을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는 물가에 ‘인도받는다’고 말합니다. 이건 아주 중요한 차이입니다. 신앙은 단지 갈증을 해소하는 종교적 습관이 아니라, 목자 되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물가로 밀어 넣으시는 분이 아니라, 물가까지 함께 걸어오시는 분이십니다.
쉴만한 물가, 그것은 ‘쉼의 장소’이자 ‘하나님의 임재가 흐르는 자리’입니다. 이 물은 단지 식수로서의 물이 아니라, 에덴의 강처럼, 생명의 말씀처럼, 성령의 은혜처럼 흐르는 거룩한 샘물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요 4:14)라고 하신 그 물, 그 영적 샘이 바로 여기에서 예표되고 있습니다. 히브리 시는 물을 단지 대상화하지 않습니다. 물이 스스로 살아 움직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숨결처럼, 영혼의 피로를 감싸 안는 고요한 품입니다.
안식은 싸워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목자께로부터 오는 은총입니다 (시 23:2)
오늘날 우리는 너무도 많은 것을 쟁취해야 얻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쉼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쉼을 위해 휴가를 계획하고, 돈을 벌고, 일정을 조율하지만, 그 쉼이 진짜 안식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일까요? 쉼을 상품처럼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말합니다. 쉼은 내가 얻는 것이 아니라, ‘그가 인도하심’으로 받는 것입니다.
쉴만한 물가에 도달하는 것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끄심입니다. 이건 굉장히 복음적인 진리입니다. 우리는 안식을 스스로 만들 수 없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불안한 존재이기에, 진정한 쉼은 외부로부터 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겁게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눌러서 이끄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안식으로 이끄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지쳐 떨어질 때, 그분은 인도자가 되셔서 우리를 쉼의 강가로 이끌어 주십니다.
그리고 여기서 ‘인도하심’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나할’인데, 이 단어는 단순히 앞서 걷는 것이 아니라, 손을 잡고 길을 안내하는 친밀함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손끝으로만 명령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손을 붙드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숨소리까지 아시는 분이십니다 (시 23:2)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 이 두 이미지는 단지 외적 풍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내적 성품을 반영하는 상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쉼을 강요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잠잠히 눕기를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 말하지 않아도, 우리의 숨소리만으로도 피로를 알아채시는 분입니다.
목자 되신 하나님은 양이 내는 신음조차 알아듣고, 그들의 걸음에서 방향을 읽으시며, 그들의 눈빛에서 목마름을 감지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쉬게 하실 때, 그것은 명령이 아니라 초대입니다. 억압이 아니라 배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안식을 위해 자신이 쉬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사역은, 우리의 회복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은 지금 어느 지점에 있습니까? 혹시 광야입니까? 혹은 내면이 너무 시끄러워, 아무리 휴식을 가져도 쉼이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이 말씀을 가슴에 새기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을 푸른 풀밭에 눕게 하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느끼지 못해도, 그분은 이미 손을 내밀고 계십니다.
마무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편 23편 2절은 짧은 문장이지만, 그 안에는 복음의 중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목자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양입니다. 우리는 긴장과 불안으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하나님은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를 예비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의 인도는 절대적으로 신실하며, 그분의 쉼은 영혼 깊은 곳까지 닿는 회복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그분의 손을 붙들어야 합니다.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눕게 하시고, 인도하시는 그 길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여러분의 속도를 아시고, 여러분의 피로를 아십니다. 그분의 품 안에서만 가능한 진짜 쉼, 영혼의 푸른 평야를 누리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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