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3편의 히브리 문학적 특성-‘동사’를 중심으로
동사로 숨 쉬는 시편 23편: 움직임으로 말하는 하나님의 시
시편 23편은 단지 읽히는 시가 아니다. 그것은 숨 쉬고, 걸으며, 싸우고, 누이며, 끝내 초대하는, 행동하는 시이다. 이 짧은 여섯 절 속에서 사용된 동사들은 마치 실크 같은 문장들 사이로 삽입된 신성한 움직임의 물결처럼 기능한다. 시인은 하나님의 본성을 철학적으로 서술하는 대신, ‘무엇을 하시는 분인가’로 답한다. 히브리 시는 늘 그랬듯 정태적 개념보다는 동적 실재를 강조한다. 시편 23편은 그 전형이다.
누이시며(시 23:2) — 안식의 해방, 눕히는 하나님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시 23:2). ‘누이시며’는 히브리어 “야르비츠”로, 능동적이면서도 강한 의도를 가진 동사다. 이 동사는 ‘억지로 눕힌다’는 느낌보다는, 심리적 해방의 완성, 곧 “그분이 나를 눕게 하셔도 나는 저항하지 않는다”는 깊은 신뢰를 내포한다. 이 눕힘은 안락한 침대가 아니라, 불안한 생존 본능을 잠재운 완전한 안식의 상징이다.
이 눕힘은 단순한 동작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 세계 안에 조성하시는 ‘샬롬의 기후’이다. 풀밭이 푸르러야 누울 수 있고, 양은 안전해야만 눕는다. 따라서 이 동사는 하나님의 공간적 주권과 내면적 안정감이 동시에 깃든 시적 절정을 상징한다.
인도하시는도다(시 23:2) — 순례의 동행, 방향의 하나님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2). 여기서 ‘인도하시다’는 동사 “나할”은 단순한 길 안내가 아니다. 이는 마치 성소로 이끄는 제사장의 손,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놓는 하나님의 손처럼 정서적 연민이 가득한 인도이다.
이 인도는 목적지가 분명한 여정이다. 하나님은 방황하게 하지 않으신다. 이 동사는 움직이는 발걸음이 아니라, 마음의 흐름까지 동반하는 임재의 이동성을 가리킨다.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단지 선두에 계신 분이 아니라, 손을 잡고 함께 걷는 하나님-동행자이다.
소생시키시고(시 23:3) — 숨결의 회복, 부활의 씨앗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시 23:3). ‘소생시키다’는 “슈브”라는 히브리어 동사로, 성경 전체에서 가장 신학적으로 무게감 있는 동사 중 하나다. 이 단어는 회개, 복귀, 복원, 재구성의 뜻을 모두 포함한다.
여기서의 ‘소생’은 단순한 회복이 아니다. 그것은 산소가 다시 폐에 들어오는 것 같은 생명의 재부여, 곧 미세한 부활의 기운이다. 이 동사는 절망 끝에서 인간을 붙드시는 창조적 재호흡의 하나님을 드러낸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단지 고통을 덜어주는 분이 아니라, 고통 속에 새로운 길을 터뜨리시는 분이라고 믿는다.
인도하시는도다(시 23:3) — 의의 도정, 계약적 이끄심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3). 앞서 2절의 ‘인도’와 동일한 ‘나할’이 반복되지만, 여기서는 의의 길이라는 새로운 길목을 제시한다. 이 동사는 더 이상 푸른 풀밭의 인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과 이름을 걸고 행해지는 방향성 있는 행위다.
의의 길은 정서적 평안보다는 언약적 의무와 영적 방향성을 가진 도정(道程)이다. 다시 말해, 이 동사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진리를 완성해 가시는 예언적 걷기이다. 시인은 길을 걷고 있지만, 실상은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따라 걷고 있는 중이다.
다닐지라도(시 23:4) — 어둠의 순례, 밤의 항해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시 23:4). 히브리어 동사 “할라크”는 ‘걷다’라는 일상적인 표현이지만, 여기서는 극적으로 문맥이 반전된다. 시인은 죽음의 그늘 아래를 걷는다. 그러나 이 걷기는 단순히 발걸음을 옮긴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두려움을 관통해 지나가는 순례적 행위다.
‘다닌다’는 표현 속에는 기피가 아닌 직면, 포기가 아닌 관통의 힘이 들어 있다. 이 동사는 하나님을 동반자로 인식한 자만이 감행할 수 있는 고난의 동행 선언문이다. 히브리 시는 바로 이 동사를 통해 인생의 음침한 구간조차도 하나님의 동행 앞에서는 통과의례가 될 수 있음을 노래한다.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 위로가 아닌 무장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 23:4). ‘안위하다’는 번역된 히브리어 “네함”은 사실 단순한 위로의 의미를 넘어서 정서적 재무장, 믿음의 위임에 가까운 단어다. 단어 자체에 새로운 결단을 유도하는 회복의 감정이 들어 있다.
이 ‘안위’는 무력한 위로가 아니다. 그것은 지팡이와 막대기라는 상징적 도구를 통해 전해지는 보호의 선언이다. 히브리 시에서 도구적 이미지와 감정이 하나로 엮여 쓰이는 경우, 시적 내러티브의 ‘감정적 톤’을 결정한다. 이 동사는 시의 분위기를 고통에서 안정으로, 불안에서 사명의식으로 이동시키는 전환점이 된다.
차려 주시고(시 23:5) — 영적 잔치의 개시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시 23:5). ‘차리다’는 동사 “아라크”는 군사적 뉘앙스를 담고 있다. 이는 전쟁터에서 전열을 정돈하거나, 왕의 잔치를 준비할 때 식탁을 배열하는 행위에 쓰였다. 단순히 음식이 준비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주권자의 선언적 식탁이다.
하나님은 이 식탁을 ‘원수의 목전에서’ 배치하신다. 따라서 이 동사는 단지 섬김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적을 향한 영적 도발이자 승리의 퍼포먼스이다. 하나님은 잔치로 싸우신다. 그리고 이 싸움은 무기가 아닌 존재 자체로 이기는 전쟁이다.
따르리니(시 23:6) — 추적하시는 은혜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시 23:6). 위에서 언급한 ‘라다프’는 고통을 쫓는 단어였다. 그러나 여기서의 동사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추격하는 역설적 복음이다. 기다림이 아닌 추격의 은혜 — 이 동사는 복음의 주체가 사람이 아님을 다시 확인시켜 준다.
하나님은 서성이거나, 떠난 자가 아니라, 쫓아오는 자다. 복음은 인간의 수동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동성으로 시작되고 마무리된다. 이 동사는 시편 23편 전체를 결산하는 운동의 방향성과 확신의 동사다.
살리로다(시 23:6) — 돌아감의 영속성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 23:6). 이 마지막 동사는 히브리어로 “야샤브”, ‘거하다’, ‘정착하다’, ‘영속적으로 앉다’는 뜻이다. 여기서 시인의 동사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모든 길이 끝나고, 모든 추적이 마무리되고, 이제는 머무는 자리로 초대된다.
이 ‘살리로다’는 단지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관계의 영원성, 하나님의 임재 안에 영속적으로 정착하는 존재적 완성을 의미한다. 이것은 목적지에 이른 순례자의 마지막 숨결이자, 종말적 안식의 선언이다.
마무리
시편 23편은 동사들의 노래다. 각 동사는 정지된 진리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이 인간 삶에 침투하는 장면들이다. 이 시는 ‘하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보다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는가’에 대한 실천적 대답이다. 그리고 그 모든 동사들은 결국 하나의 목적지를 향한다. 그것은 여호와의 집이며, 그분의 임재 안에서 거하는 쉼이다.
동사로 구성된 이 시편은 고백이면서도 기도이며, 찬양이면서도 회복이다. 하나님의 행동 속에서 신앙인의 영혼은 움직이며 머무르고, 쓰러지며 일어나고, 방황하며 돌아오는 여정을 경험하게 된다. 시편 23편은 ‘행동하는 하나님’을 통해 ‘걸어가는 인간’을 완성시키는 하나님의 시적 신학이다.